푸른 바다만큼 서로 사랑하기
마흔이면 아직 젊은데, 왜 직장 관두냐고? 젊으니까 관두지! 본문
난 마흔에 은퇴했다. 2020년, 이제 작년의 일이고, 은퇴를 준비한 지 5년 만의 결과다. 내가 은퇴를 했다고 이야기하면 주위의 사람들은 이제 전업주부의 삶을 선택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 너 정도면 오래 일했지, 남편이 돈 벌잖아.”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말한다.
“우리 은퇴했어. 남편이 나보다 먼저.”
부부가 같이 이른 은퇴를 했다고 하면, 그때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진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질문을 마구 쏟아내기 일쑤다.
“로또라도 당첨됐어?” “그 좋은 직장을 왜 그만둬?” “마흔이면 아직 젊은데.”
하지만 우리의 은퇴는 결혼하면서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백수가 체질인 남자, 일탈을 꿈꾸던 여자
나의 첫 직장은 포털 서비스를 만드는 회사였다. 누구나 스마트폰에 하나쯤 깔려 있는 노란 메신저 서비스가 주력이다. 남편은 그곳에 경력직으로 입사했다. 우리는 그 회사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딱 포털 서비스 기획자처럼 생겼어요.”
“포털 서비스 기획자처럼 생긴 건 뭐예요?”
“그냥 회사처럼 젊고 발랄한 느낌?”
남편은 내 첫인상이 상상했던 포털 서비스 기획자의 모습이라고 했다. 이 말은 칭찬일까? 우리는 같은 프로젝트를 하면서 친해졌다. 남편은 내가 기획을 담당한 서비스의 개발자였다. 난 담당 개발자인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일 때문이었다.
처음은 일 얘기로 시작했으나 우린 취향이 비슷했다. 좋아하는 음식, 음악, 영화, 책까지 비슷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일 얘기보다 사적인 대화가 점점 많아졌다.
“그 책 봤어요?”
“어, 이거 내가 보고 싶었던 책인데.”
“주말에 출근하면, 이거 2권도 빌려줄게요.”
그는 주말에 나오라고 책으로 유혹했다. 함께한 프로젝트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야근과 주말 출근을 밥 먹듯이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렇게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우리는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비혼주의자라고 했다. 이른 은퇴를 할 거라서 누군가를 책임질 수 없다고 말했다.
“내가 먹여 살리면 되잖아.”
남편은 나의 그 한마디에 반해 결혼을 결심했다. 남편은 오래전부터 마흔에 은퇴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자기는 백수가 체질이라며, 회사 생활을 더 하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그리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의 나이 서른쯤, 대책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한달간 동남아로 배낭여행을 다녔다고 한다. 미리 준비된 여행도 아니었다. 여행책 한권을 사서는 들고 내키는 대로 여기저기 다녔다. 그는 그 시절을 항상 그리워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준비 없는 은퇴는 두려워 계속 미루고 있었다.
그는 행글라이딩, 패러글라이딩, 승마 등 취미가 많았다. 그리고 무엇이든 배우면 평균 이상의 실력을 보였다. 하지만 항상 거기서 만족했다. 더 잘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하고, 잘하는 것보다는 즐기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보고 주변 사람들은 천생 ‘한량’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충실한 회사원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지극히 평범한 직장인. 스물아홉에서 서른으로 넘어갈 때쯤 그 평범한 일상에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삶의 이정표대로 행하고 있다는 느낌이 싫어졌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고…. 서른이니 이제 결혼하고 아이를 가져야 했다. 한번도 일탈해본 적 없던 나의 삶은 지루했다. 그때부터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조금씩 시도해보자 결심했었다. 항상 일탈을 꿈꿨지만, 막상 세상이 정해놓은 삶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것은 불안했다.
하지만 남편을 만나고 조금씩 달라졌다. 그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남편과 함께면 조금 다른 일상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은퇴를 목표로 했던 남편의 나이 마흔에 우리는 결혼을 했고, 일생일대의 일탈을 저지르기로 했다.
마흔에는 세계여행을 떠나자
여행 프로그램 보는 것을 좋아한다. 가보지 못한 나라의 멋진 풍광이 화면 가득 펼쳐질 때면 “우린 언제 가?”라고 남편과 얘기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세계여행을 떠나자 말했던 것이다. 우리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때 내 나이 서른다섯, 남편은 마흔하나였다.
남편과 나는 여행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1년에 두번 정도는 함께 어디론가 떠났다. 휴가를 내서 떠나는 여행은 항상 짧게 느껴졌다. 짧은 일정에 비해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서 여행 내내 강행군이다.
여행지의 길과 음식에 익숙해지고, 현지의 매력에 푹 빠져들 때쯤은 현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된다. 우린 여행지에서 여유를 즐기지 못했다. 여기를 또 언제 오겠어 하며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잠을 아꼈다. 그런 여행 이후 회사에 돌아가면 둘 다 녹초가 되어버렸다.
회사에서 모처럼 긴 휴가를 받아 남편과 터키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우린 차를 렌트해서 지중해부터 돌아보기로 했다. 눈부시게 푸르른 지중해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들은 모두 아름다웠다. 목적지 중 한곳인 ‘카시’에 도착해서 호텔에 체크인할 때였다. 주인장이 말했다.
“여기서 며칠 정도 머무를 예정이에요?”
“저희는 1박만 하고 떠나요.”
“1박이요? 이 아름다운 곳에서 어떻게 하루만 머무를 수 있죠?”
형제의 나라에서 왔다며 터키인 특유의 친근함으로 우리를 환영하던 그는 크게 안타까워했다. 우리 뒤로는 한달쯤 살 것 같은 커다란 여행가방 두개를 가지고 체크인을 기다리고 있는 유럽인들이 있었다.
카시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뜨거운 햇살에 보기 좋게 그을려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긴 휴가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잡은 터키 여행 일정은 다른 짧은 여행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고 싶은 장소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지중해 여행을 끝낸 이후에는 카파도키아에서 열기구를 타고,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이스탄불도 가야만 했다.
카시는 작은 도시였지만 아기자기한 즐길 거리가 많았다. 우린 작은 보트를 빌려 지진으로 물에 잠긴 옛 도시와 고대 리키아인의 무덤을 둘러보았다.
하루 일정이었기 때문에 보트 투어만 하고 다음날은 바로 떠나야 했다. 카시에서 아직 해보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여기서 조금 더 머물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우린 다음 목적지인 ‘안탈리아’ 호텔 예약을 이미 마친 이후였다. 취소 수수료가 아까웠다. 고민 끝에 결국 하루만 머물고 떠났다. 그때 우리는 여행지의 여유를 즐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세계여행을 떠난다면 그땐 카시에 오래 머무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궁리를 거듭했다. 남편에게 물었다.
“세계여행 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글쎄, 한 2년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2년 동안 여행이라니 생각만 해도 설렜다. 하지만 회사에서 2년이나 쉬도록 허락해줄지가 걱정이었다.
“그래, 좋다! 근데 회사에는 어떻게 말하지?”
“회사는 그만둬야지.”
난 휴직을 생각했는데, 남편은 그만두는 걸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세계여행을 떠나는 것은 좋았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막막했다. 2년 업무 공백기가 있는데 재취업이 가능할까? 취직을 못 하면 돌아와서 어떻게 먹고살지? 하는 생각이 들어 남편에게 말했다.
“그럼 돌아와서는 어떻게 해?”
“그때 고민해보지 뭐.”
난 사서 걱정하는 편이고, 남편은 닥치지 않은 일을 미리 당겨서 고민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걱정부터 앞서는 나를 보며 신기하게 생각했다.
구글 독스에 새 스프레드시트를 만들었다. 시트의 제목은 ‘세계여행’이다. 한달에 저금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금액을 적어보았다. 2년 동안 세계여행을 다니려면 얼마가 필요할까? 얼마를 모으고 그만둬야 하지? 그럼 몇년 더 일해야 하지?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너 마흔살 때 은퇴하면 되겠네.”
내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남편은 퇴사 날짜까지 정했다. 뭔가 딱 떨어지는 나이 같긴 했다. 그럼 앞으로 남은 5년 동안 우리가 모을 수 있는 돈이 얼마나 될지 다시 계산했다. 내가 계산한 시트를 보고 남편이 말했다.
“이 정도면 몇년 놀아도 굶어 죽지는 않겠네. 지금처럼 돈을 벌 필요도 없지 않을까?”
“그런가….”
“이 돈 좀 까먹다가 아르바이트하면서 살지 뭐. 둘이 같이 벌면 많이 벌지는 못해도 먹고살 수는 있어.”
“그래도 좀 걱정되긴 하는데.”
“괜찮아. 우리 둘 다 연금 있잖아.”
연금만으로는 앞으로 남은 긴 시간을 버틸 수 없다. 그럼에도 남편은 아무 걱정이 없어 보였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그래…. 뭐…. 세계여행은 꼭 해보고 싶었으니.”
“더 나이 들면 힘들어서 남미나 아프리카는 가기 어려울 거야.”
“어떻게든 되겠지. 그래 나 마흔에 떠나자.”
그렇게 우리는 은퇴를 결심했다. 세계여행을 가자며 가볍게 시작했던 ‘은퇴’라는 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무겁게 다가왔다.
불안한 마음을 덜기 위해 틈날 때마다 남편과 은퇴를 이야기했다. 은퇴 이후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우리는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게 5년 동안 차근차근 은퇴 준비를 시작했다.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 내가 두려워할 때마다 남편은 옆에서 안심시켜주었다.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살아가는 데는 생각보다 큰돈이 들지 않는다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살다 보면 새로운 길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가끔 남편은 이렇게 얘기한다.
“남편 잘 만나서 마흔에 은퇴도 하고 부러워. 그건 내 꿈이었는데 말이야.”
김다현 작가
▶ 20~30대에 열심히 돈을 모아 자립하는 조기은퇴자를 ‘파이어족’(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 경제적 독립, 조기은퇴)이라고 한다. 극단적인 절약과 재테크로 악착같이 돈을 모은 초기 파이어족들과 달리 최근엔 현실적인 돈 모으기와 생활비 계산으로 조기은퇴를 실천하는 것이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아이티 기업에서 근무하다가 조기은퇴한 김다현씨 부부의 경험담을 싣는다.
한겨레신문에서 인용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91425.html#csidxe29995baea7db5f9ea9c2dc8a1cec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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